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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째 계속되는 외국인 근로자 특집. 너무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1박 2일은 히든카드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마지막에 터트린 히든카드는 너무나 확실한 카드여서 1박 2일은 쉽게 보여주지 않고 끌었나보다. 1박 2일은 여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일상을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해 도전하고 싶어하고, 경험하고 싶어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곳을 향한 항해. 그것이 바로 여행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가장 잘한 여행은 떠날 때 설레임으로 가고, 돌아올 때 그리움이 남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행은 언제나 돌아옴을 전제로 하는데, 여행의 끝에는 고향이라는 곳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행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여유롭고 호화로운 휴식의 시간과 공간이지만, 해외에서 근로하는 것 또한 그들에겐 또 다른 의미의 여행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 수는 작년 10월 법무부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총 56만 708명(전문인력 약 4만 명)이고, 불법 체류자까지 합하면 약 100만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들의 노동시간은 평균 10.7시간이고, 임금 평균은 154만원 정도가 된다고 한다. (참고: 정책공감 블로그) 각기 다른 이유로 먼 타지에 와 있지만, 대부분 고향에 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으로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1박 2일에서는 이들을 위해 고향으로 잠시 갈 수 있는 기회를 영상으로 준비해 주었다. 맛있는 카레 요리를 먹고 언제나 그러했듯 잠자리 복불복을 해야 했지만, 잠자리 복불복 대신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고 하며 영상을 보여준다. 그 영상에는 같이 온 외국인 친구들의 고향 영상이 담겨져 있었다. 제작진이 직접 각 멤버들의 집에 직접 찾아가서 보고 싶은 가족의 영상과 안부인사를 담아온 것이다.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안아플 아이들, 부모님과 형제들, 눈에 선한 고향 집을 보며 그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멤버들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물론 시청자도 이 때 함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0년이 넘게 고향을 떠나 먼 타국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감히 상상도 못했을 영상 선물은 그 어떤 선물보다도 그 크고 뭉클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잠자리 복불복은 없고 그냥 1박 2일 멤버 파트너와 함께 잠을 자러 간 그들은 방 안에 숨겨진 엄청난 선물과 마주하게 된다. 1박 2일 멤버들은 안에 따로 준비한 또 다른 선물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서 보라고 한다. 방 문을 연 그들의 모두 호흡을 짧고 크게 들이마셨다. 차마 말도 안나오는 그 광경과 선물은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이 가장 그리워했던 가족이었던 것이다. 까르끼의 아내와 두 딸, 칸의 어머니와 형제, 아낄의 어머니, 예양과 아버지, 쏘완의 아내와 딸과의 만남은 이산가족상봉과 같은 감동과 가슴속 깊은 곳까지 전해오는 사랑이 전해졌다. 

빈 가슴을 채워주는 이름, 가족


너무나 외로운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 어떤 시절보다 우을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가 아닌가 싶다. 그 어떤 때보다 평화롭고, 발전된 사회에서 풍족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감정은 메말라 있고, 외로움에 사무쳐 있는 시대이다. 그 외로움이 자연스럽게 소통이란 키워드로 이어지고, 그것은 온라인을 통해 웹 2.0으로 이어지며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등의 서비스들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방송 프로그램도 소통이란 키워드를 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1박 2일은 그런 소통의 트렌드를 끌고 가는 쌍두마차로 나아가고 있고, 이번 외국인 근로자 3번째 방송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다. 

소통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면, 1박 2일은 무모하리만큼 큰 제작비를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대사관들이 도와주고, 사람들과 기업들이 도와주어 5명의 외국인 근로자의 가족을 만나게 해 주었는데, 그런 의지와 기획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소통의 메시지에 중점을 두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단순히 시청률에 연연했다면 자극적인 게임과 인기 아이돌과 함께 러브라인 만들기를 했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시대는 다른 무언가를 갈구한다. 그것이 바로 소통이고, 1박 2일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고향, 그리고 그 고향에서 최종 목적지인 가족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그들이 한국에 온 이유이며, 우리가 그들과 하나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까르끼 아내의 말이 너무나 가슴에 절절히 와 닿았다. 혼자 살기 싫다는 아내의 절규. 함께 네팔로 가자는 아내의 말은 현실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까르끼는 가족을 위해 먼 타국에 와서 힘든 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아내는 가족을 위해 같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가족을 향한 책임감에 가족을 떠나왔지만, 가족은 같이 있을 때 비로소 가족이 되는 딜레마적 상황인 것이다. 

똘망 똘망한 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얼굴을 한없이 쓰다듬으며 축복을 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말 없이 아플 때 읽어보라고 쪽지를 건내는 묵묵한 아버지의 손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혼자 살기 싫다며 같이 가자고 때쓰는 아내를 보고 어떤 남편이 어깨를 들썩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들썩이는 가장의 어깨는 천하장사 강호동도 무방비로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왜 눈물이 났을까? 그건 우리의 일상도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가 넘어서 들어오는 보통 직장인의 생활. 집에서는 잠만 자고 다시 직장으로 향하게 된다. 그나마 남편만 직장 생활을 하면 나은 상황이다. 맞벌이를 하게 되면 온 가족이 이산가족이 되어버린다. 외국인 근로자의 삶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외로움과 고독함에 사무치듯, 우리도 외로움과 고독함에 사무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족이 그러운 것이고, 그들을 공감하게 된 것이다. 외국인 근로자와 소통하게 되었고, 그 소통의 매게는 가족이었다. 가족의 사랑이 시청자와 1박 2일과 외국인 근로자를 하나로 이어준 것이다. 

1박 2일, 3전 4기 시작!


1박 2일은 최근 가장 큰 위기에 몰렸었다. 그리고 보란듯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그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소통이란 키워드를 놓치지 않고 원칙으로 삼은 과감함에 있지 않나 싶다. 혹자는 그렇게 많은 제작비를 들여도 되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흘린 눈물과 느낀 가족의 소중함과는 비할바 못 될 것이다. 톱스타로, 자극적인 상황으로 눈 앞의 위기를 대충 넘기려 했다면 이 위기는 계속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1박 2일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할 수 있는 이유는 원칙을 지킴으로 얻어낸 기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원칙을 지키며 성장해 나가는 1박 2일이 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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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관심을 받고 자라고, 관심을 받으며 살길 원한다. 서로의 관심 속에 사회성이 길러지며,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인생사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경제적 이유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 경제적 이유란 돈이겠지만,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닌, 돈을 향한 욕망의 강도가 소외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지붕뚫고 하이킥을 보며 가장 재미있게 보는 캐릭터이자, 슬픈 캐릭터는 해리인 것 같다. 빵꾸똥꾸로 많은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해리이지만, 황정음과의 친구편에서 해리의 의사소통 문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해리는 세상의 사람을 두분류로 나눈다. 그것은 빵꾸똥꾸와 친구이다. 그나마 친구는 거의 없고, 대부분의 사람이 빵꾸똥꾸이다.


빵꾸똥꾸라는 말은 이순재가 방구를 뀌자 이현경에 똥꼬 좀 막으라는 말에 말이 느렸던 어린 해리가 빵꾸똥꾸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해리에게 빵꾸똥꾸는 그 단어의 뜻보다는 담겨진 의미가 많은 단어이다.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던 단어였고, 그 단어를 반복할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하지만 해리가 생각하는 빵꾸똥꾸의 뜻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빵꾸똥꾸의 뜻은 달랐다. 해리에게 있어서 빵꾸똥꾸는 관심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지저분한 단어, 혹은 불쾌한 단어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서 의사소통의 문제는 일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어릴 땐 관심을 받기 위해 빵꾸똥꾸라 해도 사람들이 귀엽게 봐 주었겠지만, (특히나 말이 느렸기에) 성장할수록 해리가 빵꾸똥꾸라하면 사람들의 표정은 불편해하고 기분 나빠했을 것이다. 거기에서 해리는 의사소통의 오해로 상처를 받게 되었고, 그 이후 친구 외의 모든 사람은 빵꾸똥꾸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해리는 의사소통에 서투른 아이가 되었을 것이다. 해리와 친구가 되면 우선 절친이라는 의미로 빠진 앞니를 보아야 하고, 해리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거침없이 먹어야 한다. 지저분하기 그지 없는 그런 행동들은 해리에게 있어서 관심의 표현이었지만, 사람들에겐 지지분하고 불쾌한 행동일 뿐이었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관심을 거부하게 되고, 그 관심을 거부한 거절감에 해리는 폭발하며 빵꾸똥꾸를 외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앞니를 보여주고, 먹던 것을 주는 행위는 해리에게 있어서 최상의 관심 표현이고, 절친에게만 하는 행동이다.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빵꾸똥꾸같은 지저분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이는 바로 잡아주어야 하는 것이고, 바로 잡아준다는 것은 교육에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의 부재가 해리를 빵꾸똥꾸로 만들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의 인성교육 부재, 가정에서의 가정교육 부재가 만들어낸 우리 시대의 아이들인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잘못되었다는 것보다는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교육을 통해 충분히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리는 친구를 만들고 싶어한다. 직장에 다니느라 항상 바쁜 엄마, 회사에서 오랜 시간 있는 아빠와 할아버지, 학교가서 늦게 오는 오빠, 병원가서 아예 안들어오기 일수이고, 들어와도 들은체도 못하는 삼촌 사이에서 해리는 소외감과 고독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소통의 부재는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오해의 연속은 해리를 열받게 했다. 그래서 해리는 모든 사람들을 빵꾸똥꾸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말의 의미는 "자신의 관심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란 뜻이 아닐까 싶다.

해리가 신애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애의 순수함과 작은 것에 대한 관심들이 해리와 친구가 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같은 또래의 전혀 다른 환경의 아이.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서 소통이 이루어지고 화합이 일어나는 것이니 말이다. 해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성을 배워 신애와 절친이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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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뚫고 하이킥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해리이다. 버릇없는 행동과 빵꾸똥꾸 캐릭터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는 해리는 파격적이면서도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이들이기도 하다. 오냐 오냐해서 키운 안하무인 아이들. 그 대표가 바로 해리인 셈이다. 오냐 오냐한 아이들은 과잉보호와 관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관심이기도 하다. 부모가 아이의 기 살리기에만 몰두한 나머지 교육에는 무관심했기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를 찾는다면 가장의 부재를 들고 싶다. 해리가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 버릇없는 아이가 된 것처럼 소외는 아이의 문제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사회적 문제이고, 그 중 가장 큰 부분은 가장이 차지하고 있다.

이번 애피소드에서는 정보석의 굴욕이 담겨있었다. 만날 장인어른인 이순재에게 맞고 쫒겨나기 일수인 정보석을 보고 있던 아들은 추운 겨울에 대문 밖에 가운만 입고 벌벌 떨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외할아버지에게 대들게 된다.


정보석은 그것이 아니라 외할어버지가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라며 아들을 다독인다. 그리고 아들 준혁이와 함께 등산을 하기도 한다. 산의 정상에 올라 아들과의 훈훈한 대화는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와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한잔 걸치자 그동안의 설움을 아들 앞에서 울며 불며 풀어내게 된다. 분노와 우울이 함께 나타나며 설움을 폭발적으로 쏟아내고야 마는 아버지.

아들과 오랜만에 함께 자는 것이 술마시고 취해서 자는 것임을 깨달은 정보석은 잘난 아빠는 아니어도 좋은 아빠라도 되고 싶었는데 그나마도 너무 힘들다며 아들의 방을 빠져나간다.


고개 숙인 이 시대의 가장

정보석은 이 시대 가장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듯 싶다. 가장의 능력과 역할은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88만원 세대에 언제 책상이 없어질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경제적인 위치와 지위가 점차 박탈됨에 따라 능력 없는 아버지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결혼을 안한 남성은 아예 비혼으로 남게 되기도 한다.

집 안의 기둥인 가장이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홀대받고 소외당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정보석의 경우는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할 수 있지만, 처갓댁의 힘일 뿐, 자기 자신은 막노동 외에는 혼자 돈을 벌 수 없는 가련한 가장에 불과하다. 그의 능력은 가족 내에서 무시를 당하는 수준이고, 그의 실수는 곧바로 슬리퍼로 날아온다. 이는 가족 내에서 가장의 부재를 나타내고, 가장의 소외는 곧 가족의 위기로 찾아온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세경과 신애가 같이 살게 된 이유도 가장의 부재이다. 세경과 신애의 아버지는 사업의 실패로 사채를 쓰게 되고, 그로 인해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역시 경제적인 이유로 가장의 부재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가장들이여, 고개를 들자.

아프리카 캐냐 마사이 부족과 1달 동안 같이 지낸 경험이 있다. 그곳은 일부다처제로 사냥과 전쟁으로 남자가 부족하다보니 일부다처제는 종족 유지를 위한 문화적 선택이었다. 내가 있던 곳에는 기본적으로 한 남자 당 10명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고, 1명의 아내마다 10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즉, 1명의 가장은 100여명의 가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가장이 무너지면 100명이 모두 무너지게 된다. 그만큼 가장의 권위가 잘 세워져 있기도 하다.

가부장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교적인 가부장제도의 피해는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가장의 존재는 가족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정신적으로,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이고,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능력이 구심점을 없애버린다면 원자에 핵이 없어져 전자들이 튕겨져 나가는 것과 같이 가족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가족은 바로 이런 가족의 모습이고, 이 시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이번 회는 너무도 마음 속에 와 닿았다. 정보석의 주정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가슴 속을 후벼파는 분노와 우울의 표출이 공감과 책임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잘난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것이 모든 아버지가 원하는 아버지상일 것이다. 하지만 "잘난"이라는 것은 "못난"을 수반하기에 경쟁 구도 속에서 상위 몇 퍼센트만 차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석은 상대적 개념일 뿐 비교적 이루기 쉬운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얼마나 미안하고 속상했을 지 그 마음이 TV밖을 통해 전해져왔다. 정보석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 정보석은 정준혁에게 좋은 아버지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마음 그 자체가 좋은 아버지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경제적 능력이나 다른 능력이 가장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가장의 존재는 "좋은" 가장이 되고자하는 의지와 마음이 있을 때 나타나게 된다. 경제적 능력이나 기타 능력이 없다고 좌절하거나 고개 숙일 필요가 없다. 가장이 일어나야 가정이 일어나고, 가장이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선다. 이제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말고, "좋은" 가장이 되고자 하는 의미와 마음을 갖는다면, 분명 좋은 가장으로 고개를 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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