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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의 실신과 같은 날 일어난 촛불시위 과잉진압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만큼 암담하고 참혹했다. 주일에 일어난 2가지의 상반된 사건은 둘다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완전 반대의 의미였다.

김장훈은 서해안을 살리기 위해 공연을 하다가 실신을 하였고, 이명박은 촛불을 끄기위해 물대포와 곤봉으로 사람들을 실신시켰다. 공교롭게도 둘 다 기독교인이고, 또한 주일에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이 두가지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지만, 성경의 말씀을 빗대어 생각해보았다. 아래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옥중에서 쓴 서신이다. 내용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칭찬의 3요소가 나온다. 바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이다. 기독교인으로 칭찬을 받기위해선 적어도 이 세가지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비난의 3요소는 무엇일까? 거꾸로 해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1. 믿음의 역사 ↔ 불신의 역사

믿음
김장훈의 가창력은 차치하더라도 김장훈이 낸 음반을 살 때 우리는 쉽게 '아! 이 음반을 사면 모두 좋은 일에 기부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빚을 내서 기부를 하는 김장훈에게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번 서해안 페스티벌 때에도 유명 가수들이 참여를 했다. 윤도현 밴드, DJ DOC, 슈퍼주니어, 노브레인등이 참여한 서해안 페스티벌은 무상으로 출연하여 화제를 내기도 하였다. 동료 가수들도 김장훈이 제의를 하면 그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가 부탁하는 공연은 분명 좋은 일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선뜻 무료로 공연에 동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불신
무엇을 해도 안 믿는다. 재협상을 해도,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려도, 대운하 취소를 해도 이제 사람들은 안 믿는다. 어떠한 좋은 일을 해도 국민을 곤봉과 물대포로 실신시키고 무자비하게 진압한 이명박 정부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명박산성은 이미 먼저 국민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 것이다. 국민과의 차단을 선택하고, 큰 벽을 쌓아 불신을 조장하였기에, 국민들도 믿지 않는다. 콩으로 매주를 쑨다해도 믿지 않는다. 그는 왜 국민을 믿지 않을까. 그건 바로 두려움 때문이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그는 차단하고, 불신하며 때려 잡는 과격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한 나라의 리더가 멤버를 불신하고, 폭력으로 진압한다면 그 조직이 어디로 갈지는 안봐도 비디오다. 그는 국민에게만 비난받지는 않을 것이다.


2. 사랑의 수고  ↔ 분노의 수고

사랑
김장훈이 쓰러지면서까지 투혼을 발휘하여 얻은 것은 무엇일까? 빚까지 내어가며 기부를 함으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사랑이다. 왜냐면 그는 돈을 기부한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다 쓰러진 것이 아니라 사랑을 기부한 것이고, 사랑을 부르짖다 쓰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김장훈에게 그런 사랑을 느낀다. 적어도 가출 청소년이나, 서해안 피해 주민들, 그의 공연을 보는 팬들등 그의 도움과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댓가없는 사랑을 느낄 것이다.

그는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 사랑의 수고는 사람들에게만 칭찬받지는 않을 것이다.



분노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다. 점점 과격해지는 촛불시위는 그 분노의 표현이다. 하지만 그 분노를 키운 것은 바로 이명박이다. 먼저 물대포로 진압했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리지만, 그 조아림속에 분노가 느껴진다.

분노의 감정이 커져갈 수록 폭력적이 되어가고, 살인과 죽음이 잇따른다. 이 사태가 어디까지 갈 지 모르겠지만, 이 분노를 잠재울 것은 쇠고기 문제도, 대운하 문제도 아닌 먼저 분노의 감정을 끊어버리고 그 감정을 사랑으로 채워넣었을 때 이루어질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금 분노의 수고를 하고 있다. 누구에게 칭찬받으려고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3. 소망의 인내 ↔ 무기력함의 인내

소망
김장훈에게는 소망이 보인다. 그가 이루려는 비전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바라보는 비전이 있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소망을 통해 많은 청소년들과 피해주민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도 같은 소망을 품게 된다. 그 소망을 향해 달려가다 실신하기도 하고, 사법처리의 협박도 받았지만 그것들을 인내함으로 그는 그의 소망에 점점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가 품은 소망에 동참하고, 그가 나눠주는 사랑에 동참하게 되고, 그에게 있는 믿음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희망을 보게 되고, 사랑을 느끼게된다. 그는 사람들에게도 칭찬받고 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도 칭찬을 받을 것이다.

무기력함
소망교회의 장로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에게서 소망을 볼 수 없다. 국민들이 촛불시위를 하는 이유는 빨갱이라서, 사탄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미래를, 소망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촛불의 작은 빛은 실낱같은 희망과 소망을 바라는 마음에서이고, 그 소망을 담은 빛이다.

광우병으로 고통받을 아이들을 걱정해서이고, 미래에 고통받을 대한민국을 위해서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고 곤봉과 물세례를 받으면서도 그 자리를 꿋꿋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날아오는 최류물대포와 쇠뭉치 그리고 곤봉은 촛불을 끄려하고, 소망을 끄게 한다. 그리고 무기력의 나락으로 빠뜨리려 하고 있다. 무력진압으로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함으로 독재정권때와 같이 눈과 입과 귀를 모두 막으려 들고 있다.

무기력함의 인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은 희망과 소망을 원하고, 한나라의 리더인 대통령은 희망과 소망을 내세우며 횃불을 들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칭찬과 비난. 혹은 하나님의 칭찬과 사탄의 칭찬. 이 두가지로 위의 세가지 조건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기독교인이 벌인 서로 상반된 이와같은 상황을 보며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나온 것처럼, 지금의 상황도 모두 기독교인이 자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더욱 큰 죄일 것이다. 지금 누가 두 기독교인이 펼치는 행동 중 어느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에게 더 가깝게 하는 것일까? 이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누가 칭찬받고 비난받을 것인지 답이 나온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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