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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주는 5천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역사만해도 3천만년이나 된다. 삼국지에서 읽었던 조조의 나라 위(魏)가 바로 이곳 정주였고, 무림의 고수들이 나오는 중원이라 불리는 곳도 바로 정주였다. 이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이기에 거리에 있는 것들이 모두 유적지나 다름없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더욱 매력적인 중국 정주이다. 정주에서 서쪽으로 140km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낙양이라는 곳이 있다. 낙양은 삼국지의 무대이기도 하고, 측천무후가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특히 1세기 이후 불교의 중심지였다고 하는데 불교가 번영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예술의 도시로서 전국시대의 노자, 당나라의 두보, 이백, 백낙천 등 많은 문인과 예술인이 활동을 했던 무대이다. 
 


낙양은 모란꽃으로 유명한데,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어디서든 모란 꽃을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이 모란을 꽃중의 꽃으로 꼽을만큼 좋아하고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낙양의 모란꽃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낙양을 목단성(牧丹城)이라고도 부른다. 
 


낙양에 들러서 처음으로 가 본 곳은 용문석굴이었다. 이번 여행을 가기 전에 가장 많이 기대했던 곳이 이곳이기도 하다. 아내가 10년 전에 중국 배낭여행을 갔었는데 이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웅장함과 고풍스러움이 멋져보였고, 나를 만나기 10년 전에 아내가 가 보았던 곳에서 나도 동일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기에 용문석굴에 갔을 때 내게 좀 더 의미가 있었다. 


입구에 있는 사진들은 용문석굴이 얼마나 유명한 곳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중국 공산당 간부들의 기념 사진이라고 하는데, 얼굴은 잘 모르지만, 많은 사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임을 알 수 있었다. 


용문석굴은 용문산에 있는 석굴이라 하여 용문석굴이다. 용문석굴은 대동의 운강석굴과 둔황의 모가오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데 저 작은 굴 하나 하나가 장인이 한땀 한땀 정으로 때려서 만든 굴이라고 하니 참 대단한 것 같다. 그 안에는 불상들이 모셔져 있는데 그 수만해도 무려 10만여개라고 한다. 


손이 닿는 곳이면 어디서든 불상을 볼 수 있다. 불상은 10여미터가 넘는 것부터, 수 센치미터에 불과한 작은 것까지 다양하게 세겨져 있다. 


날씨가 추운 비수기임에도 관광객들이 상당했다. 대부분 중국 관광객들이었는데 중국인들도 이 불상을 신기해하는 모습이었다. 용문석굴의 이런 모습은 총 1.5km에 걸쳐 장관을 이루고 있고, 언뜻 보기엔 큰 벌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북위 시대인 5세기 말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2300여개의 석굴이 조성되었다고 하니 실로 대단하다. 웅장함이란 이런 것을 뜻하는 듯 싶었다. 


작은 동굴에도 불상은 꼭 있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머리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불상머리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미신 때문이기도 하고,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파손되기도 했다 한다. 참 안타까우면서도 어떻게 칼로 자른 듯 머리만 싹 베어갔을까 그 기술이 놀랍기도
했다. 


지금은 관리원도 있고, 울타리도 있어서 유지 보수가 잘 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만불동(萬佛洞)이 석굴이 유명했는데 이 석굴에만 만 오천개의 불상이 있다고 한다. 만 오천개!!! 15,000개!


이 작은 석굴에 어떻게 만 오천개의 석불이 있나 보았더니 사진에서처럼 아주 작은 석불들이 벽면에 온통 조각되어 있었다. 그 모양이나 풍채가 하나씩 다 달랐으니 아마도 석공들은 불상 하나를 세길 때마다 절을 하고 마음을 깨끗게 한 후 세기지 않았을까 싶다. 108배가 아니라 15,000배...정말 대단하다고 느낀 것은 저 작은 석불들 중에서도 얼굴만 싹 도려낸 것이었다. 불심도 불심이지만 복을 바라는 인간의 마음도 대단한 것 같다고 느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석굴과 석불들. 크레인이나 마땅한 도구도 없었을텐데 망치와 정, 그리고 밧줄로 이 석굴과 석불들을 만든 것을 생각해보니 그 불심이 느껴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정말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바로 앞에 강이 있어서 강 바람이 매섭게 불었을텐데 말이다. 그야말로 장인이 만든 명품 중에 명품이다. 


용문석굴에 가기 전에는 각 석굴에 대한 역사와 의미에 대해 미리 공부해가면 좋을 것 같다. 하나의 석굴을 만들어 그 안에 석불을 세겨 넣기까지 적어도 몇달, 몇년은 걸렸을텐데 그 안에는 석공들의 고뇌와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인데 너무 많고, 무지하여 그저 하나의 굴로만 보고 넘어가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런 노력과 불심이 있었기에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석굴이 존재하는 것 같다. 


용문석굴의 하이라이트인 봉선사에 왔다.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 엄청 노사나대불을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노사나대불이다. 폭 35m의 석굴 안에 대불의 전체 높이는 17.4m에 달하고, 귀의 길이만 1.9m라고 한다. 측천무후가 예산을 기부하여 측천무후의 용모를 조각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설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불상을 보면 약간 곡선이 두드러진 것도 하고, 여성의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었는데, 인부들의 키와 노사나대불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유리벽을 설치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미리 가서 실물을 보는 것도 기억에 남을 듯 하다. 아무래도 유리벽이 씌워지면 사진도 잘 안찍힐테고,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다. 
 


날씨가 좋았으면 이 배도 한번 타보는 건데 아쉬웠다. 강을 유람하여 용문석굴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아찔한 용문석굴... 막판에는 다 그게 그거 같아서 쓩~ 지나가게 된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지경인데 만든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강 건너편으로 가보면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용문석굴 전경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고의 뷰 포인트는 강 건너편이다. 


그 중에서 봉선사의 노사나대불은 멀리서 보아도 얼굴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는데 그토록 크게 지은 것은 아마도 강 건너편에서 석굴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산 자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든 중국의 스케일이 멋있었다. 


아내가 사진을 찍었던 곳에서 나도 똑같이 찍어보았다. 10년의 시간을 두고 같은 곳에 서 있는 느낌은 또 색달랐다. 


강 건너편에는 또 다른 뷰 포인트인 향산사가 자리잡고 있다. 향산사는 용문산 건너편인 향산에 있는 절로서, 당나라 최고의 시인 백거이가 18년간 기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강 건너편에는 두보, 이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백거이의 묘가 있었다. 백거이는 향산사를 보수하여 향산거가라는 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곳이 백거이의 묘인데, 생각보다는 소박하게 되어있었다. 

해가 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 낙양. 모택동은 미신을 너무 믿어서 해가 진다는 의미의 낙양에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낙양에는 용문석굴도 있고, 향산사도 있고, 백거이도 만나볼 수 있다. 예술과 모란꽃이 더욱 아름다운 낙양. 이곳에 오면 자연을 예술로 삼은 웅장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왕 낙양에 갈 거라면 백거이의 시 몇편은 읽고 가면 더 느낌이 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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